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페인 내전 (문단 편집) === 음악 === 이하 공화국군: * [[리에고 찬가]] - 공화국의 '''[[국가(노래)|국가]]'''. * [[제5여단 만세|Ay Carmela]] - 인민전선 병사들이 즐겨부르던 노래를 통칭하는 말로, 추임새로 넣이는 '룸바 라 룸바 라 룸바 라'와 '아이 카르멜라(때로 마누엘라라고 바뀌기도 한다)'의 후렴구를 특징으로 하며, 같은 멜로디에 가사만 바꿔서 불렀다. 대표적으로 'Viva la Quince Brigada', 'El Paso del Ebro'가 있고 수많은 변종이 있다. 이 중 [[피트 시거]], 크리스티 무어 등의 포크 가수들이 리메이크했고 [[문명 5]] 스페인 테마로 쓰이기도 한 'Viva la Quince Brigada'[* '15여단(국제여단 중 아일랜드인들이 15여단에 속했다고 한다) 만세' 정도의 뜻이다.]가 유명하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 [[바리케이드를 향해]] - CNT/FAI의 조합가. * [[더 클래시]] - Spanish Bombs[* 인민전선의 병사들에 관한 노래다. 3집 "London Calling"에 수록되어 있다.] *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 - If You Tolerate This Your Children Will Be Next 이하 쿠데타군: * [[콘도르 군단의 분열행진곡]] * 오리아멘디 - 카를리스타들의 찬가. 원곡은 '''바스크 민요'''로, 바스크 지방이 공화파 편에 가담한 전황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다만 이는 카를리스타들의 본거지 역시 바스크 일대였기 때문으로, 우연의 일치가 겹친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이러니한 게 아니라 해방 이전엔 기독교인들이 많았던 평양은 공산당 소굴이 되었고 반대로 좌익 사회주의 세가 강했던 경북, 대구 일대는 극렬 반공 우익 정권 쪽으로 넘어간 아시아 어느 나라의 20년 뒤 비극처럼 스페인도 지역적 성향과 이념적 분열이 딱 맞아떨어지는 나라가 아니었다. 쿠데타군 세력이 처음으로 장악해서 전쟁의 교두보가 된 세비야는 '붉은 세비야'라 불렸을 만큼 좌파적인 지방이었고, 반대로 공화국이 사수한 카탈루냐, 신 카스티야 지방은 대도시 밖으로 조금만 나가면 가난하지만 신심 깊은 자영농 중심 농촌 경제가 유지되어 계급 투쟁이 덜하고 가톨릭 문화가 매우 중요했던 시골들이 많았다.[* 반대로 안달루시아는 전형적인 소규모 봉건 지주 계층이 대규모 독점 농지를 소유하면서 여기에서 수많은 땅없는 소작농들이 일했던 전형적인 라틴식 [[라티푼디움]] 경제구조를 내전기 까지 유지했다.] 이러니 쿠데타군 쪽에서 국가적으로 사상 '정화' 한답시고 안달루시아, 아스투리아스 일대에서 노조원들을 잡아서 학살하면 좌익 공화진영에선 보복으로 감옥에 처넣었던 동네 신부 끄집어 내 쏴 죽이던게 스페인 내전기의 비극적이고도 전형적인 테러의 패턴이었다. 이 와중에 바스크 지방은 예나 지금이나 지역 자본가들이 장사로 벌어 온 돈을 노동자들과 지역 사회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전통이 강한지라 군부와 왕실이 상징하는 스페인 중앙 국민는 싫지만 공화주의 세력을 혁명적 좌파가 장악한 다른 지방의 극렬 계급 투쟁과는 볼 일 없수다 하고 따로 돌아갔던 것. 애초에 이 동네는 21세기에도 몬드라곤 같은 각종 지방 협동조합, 개발 프로젝트에도 대기업, 노동자들이 골고루 참여하는지라 경제위기 이후에도 실업률이나 노사갈등 문제가 가장 덜한 지방이라고 평가받을 만큼 지역 내 사회적 유대감이 강한 곳이었으며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근대 자체가 싫다는 카를리스타 운동의 역사적 안마당이기도 한지라 지방 정부는 공화파에 남았어도 개인 단위로 국민파에 투신한 골수 가톨릭, 우익 인사들도 많았다. 정치적으로 바스크 자치 정부는 1937년 중순에 아예 군사적으로 쿠데타군을 물리칠 희망이 사라지자 다른 인민전선 정파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항복했다. 다른 정파들에겐 배신이다 뭐다 욕을 굉장히 많이 먹었지만 애초에 스페인 북부 지방 일대에서 국민파의 주축을 이루었던 카를리스타들 입장에선 연고가 가까운 사람들이었던지라 테러와 정치적 보복도 다른 지방에 비해 좀 온건했다. 스페인 내전 극초반에는 공화정부의 행정부를 차지하다시피 했던 공화좌파 진영의 총리 마르티네스 바리오가 당시 반군 수장으로 간주되었던[* 스페인 내전의 봉기 계획은 원래 에밀리오 몰라가 주도했는데 여기에 케이포 데 야노는 세비야에서, 프랑코는 카나리아와 모로코 식민지에서 따로 봉기하는 식으로 숟가락을 얹은 셈이다. 그리고 원래 계획은 케이포 데 야노와 프랑코가 남쪽에서 올라올 것도 없이 마드리드, 바르셀로나를 포함한 북부 주요 지역에서 핵심 지역을 장악하면 끝나는 거였고 원래 장군들 서열도 이 지역을 맡은 이들이 위였다. 하지만 몰라가 주도한 북부 주요 지역에서의 쿠데타는 대부분 실패로 끝난 반면 프랑코는 여유롭게 모로코를 장악한 뒤 정예 아프리카군을 이끌고 스페인 본토에 상륙하면서 상황이 역전된다.] 에밀리오 몰라와 협상하고자 했다. 앤터니 비버에 따르면 이때 몰라의 반응이 뜻밖이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국민이 있고, 내게는 내 백성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과 내가 합의에 이른다면 그것은 우리 둘 다 각자의 이념과 지지자들을 배신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 '빨갱이'들을 부정하겠다고 궐기한 극우 파시스트 군부 수장이 할 말치고는 대단히 정치적으로 온건하다. 추후 국민진영에서 이런 식으로 정적을 존중한 예는 프랑코가 죽을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물론 따지고 보면 이는 사실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도 일단은 들고 일어나는 것에 관심을 가졌지 막상 어떤 나라를 만들지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당시 쿠데타에 가담한 주요 유력인사들의 정치성향은 그야말로 제각각이었다. 저 말을 한 몰라는 일단 본인은 공화주의자였는데 막상 주요 세력 기반은 왕당파와 카를로스파였다. 산후르호 후임 바지사장이었던 미겔 카바네야스도 알레한드로 레룩스의 급진당, 공화우파 출신이었으며 스페인에서 발렌시아와 더불어 3위를 다투는 대도시 세비야를 초반에 장악하는 로또를 터뜨려 후일 독자적인 군벌로 군림한 케이포 데 야노는 물론 리베라 정권과 개인적인 악연도 있었지만 대놓고 반팔랑헤에 제2공화국 개국공신이기도 했다.] * [[태양을 마주하며]] - 팔랑헤당의 당가. * [[국왕 행진곡]] - 왕당파 찬가이자 스페인 왕국의 전 국가, 그리고 '''현용 스페인 국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